유래 : 신라 때의 충신 朴提上을 제사 지내는 사당인데 고려 태조 20년(937)에 大丞(대승) 柳車達이 신라의 시조와 박제상의 넋을 불러 제사 지내고 東鶴祠라
하였다. 조선시대 영조 4년(1728)에 申天永亂때 소실되었는데, 1956년에 중건하여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朴提上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으로서 마사왕의 5대손
勿品(물품)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는 金提上으로 되어 있다. 良州(삽랑주) 干(간)으로 있을 때,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실성왕 때 내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을 볼모로 일본에 보내고
실성왕
11년(412)에는 미사흔의 兄 卜好(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417년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에 들어가서 卜好를 데려왔고, 다음에는 왜 나라에 들어가
계책으로 미사흔을
신라에 보내고 체포되어 왜나라에서 피살되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大阿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에게 출가시켜 그 공을 보답하게
하였다.박제상이
왜나라로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떠날 때 신라 鷄頭領에서 배로 멀리 떠나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박제상의 아내와 딸의 눈물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들의
눈물은 祈雨神으로 비교하기도 하는데 旱害가 심할 때 농부들이 말하기를 "제상의 아내가 노했나"하는 것은 提上의 아내가 눈물을 모았다가 비로 뿌린다는 샤먼에서 오는 풍습에서
연유한 말인
것이다.
유래 :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上願祖師(상원조사)가 조그마한 암자를 지었는데 그 후에 懷義和尙(회의화상)이 중창하여 上願寺라 하고 그리 부르게 하였다.
고려 태조20년(937)에 신라가 망하고 大丞(대승) 柳車達이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의 넋을 불러 제사 지내고 동학사를 지었다. 이때부터 참선하는 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절의
이름을 東鶴寺라 고쳤다. 이것은 이곳 동쪽에 있는 鶴바위의 뜻을 따서 그리 부르게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영조 4년(1728)에 신천영의 난 때 모두 불타서 86년간 비어
있다가 순조
14년(1814)에 錦峯 月印禪師(월인선사)가 예조에호소하여 다시 세웠다. 고종 원년(1864)에 金剛山에 있던 중 萬化 普善禪師(보선선사)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새로 절
40칸과
招魂閣(초혼각) 두 칸을 지어서 내려오다가 6·25 사변 때 피해가 많아서 대웅전을 다시 세웠다. 동학 경내에는 肅慕殿(숙모전), 東鶴寺(동학사), 表忠寺(표충사),
三隱壇(삼은단)이
있어서 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위인들의 거룩한 정성을 엿볼 수도있는 곳이다. 동학사에 딸린 절로는 文殊庵(문수암), 彌陀庵(미타암),
吉詳庵(길상암)이 있다.
골이 깊고 수석이 기이하며 수목이 울창하여 文客들이 즐겨 찾았던곳이다. 계룡산의 삼사인 東鶴寺, 甲寺, 麻谷寺를 말할 때 동학사는 文脈이고, 갑사는 武脈이고, 마곡사는
政脈이라고 평한다.
文脈이 서린 곳이 東鶴寺다
유래 :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초까지 분청사기를 만들던 곳으로 아직도 그 가마터가 남아 있는데 사기를 굽던 마을이어서 사기소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 이삼평(李參平)이라는 도공이 일본에 붙잡혀가 일본에서 도공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박정자 앞에 비가 세워졌다 윗사기소와 아랫사기소가 있다.
유래 : 태조 3년(920)에 冶隱(야은) 吉再가 月彰, 雲禪으로 더불어 단을 모아 고려 태조와 忠定王, 共愍王(공민왕)의 넋을 불러 제사 지내고 다시 圃隱(포은) 鄭夢周를 더 제사 지냈다. 정종 원년(944)에 고려 유신 柳芳澤이 와서 圃隱 鄭夢周, 牧隱李穡(이색), 冶隱 吉再 세 사람을 제사지내고 그 이듬해에 孝貞公 李貞幹이
공주목사로 와서 閣을 세우고 고려 때의 三隱만을 제사지내며 三隱壇이라 하였다. 세조 때 招魂閣을 곁에 세우고 광해군 13년(1621)에 琴軒 柳芳澤을 더 배향하고 순조 4년(1804)에 도은 李崇仁을 추배하고 그 후에 竹軒 羅繼從(나계종)을 더 추배하였다.
유래 : 여기는 단종대왕을 비롯해서 정순왕후, 그리고 안평대군 瑢, 금성대군 愉, 충정공 皇甫仁, 忠翼公 金宗瑞, 忠莊公 鄭奔(정분), 忠正公 朴彭年, 忠文公
成三問, 忠簡公 李塏, 忠烈公 河緯地, 忠景公 柳誠源, 忠穆公 兪應孚와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전각이다. 세조 3년(1457) 가을에 매월당 김시습이 忠貞公 曺尙治, 韓城君 李蓄(이축), 仁齊 成熺, 西齊 宋侃(송간), 逋翁 鄭文産, 貞節公 趙旅(조려)와 더불어삼은단 옆에 단을 모으고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대왕의 초혼제단을 증설하였다. 그 이듬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거동하여 제단을 살핀 후 크게 감동 되어 비단에다 단종대왕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금성대군, 황보인, 정 분, 김종서와 그때 원통히 죽은 280명의 성명을 써 주고 초혼제를 지내게 한 후 초혼각을 짓게 하고 印信과 토지, 산림 등을 주어서 매년 10월 24일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영조 4년(1784)에 신천영의 난에 각이 소실되고, 정조 8년(1784)에
鄭厚謙이 位土를 팔아 없애서 제사가 중단되었다가 순조 27년(1827)에 忠淸左道御使 柳奭이 300량을 내고 그 후에 鄭河永이 祭畓을 바쳐서 수호하며 高宗 光武 8年(1904)에 肅慕殿으로 賜額되었으며 40餘年前에 端宗때 忠義가 있는 신하 26位를 더 추배하여 84位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