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역사인물 노원섭(盧元燮, 1877~1950)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항일의병장으로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대재(大哉), 호는 송암(松庵)이며,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며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06년 공주의 용당(龍堂, 현 웅진동)에서 동지 30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구성하고 의병장으로서 진안·금산·안의 등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1907년 9월에는 금산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인 가옥과 우체국, 세무서 등을 불태우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의병을 안의(安義)로 옮겨 월성산, 운장산에서 적을 연파(連破)하였습니다. 그러나 1908년 무주·진산·고산·고부 등지에서 60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다 붙잡혀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제주도 추자(楸子)로 유배되었다가 1910년 한일합병 때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전남 나주에서 임시정부의 문서를 배포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중국으로 망명해 활동하다 귀국한 후에도 독립군 군자금을 모으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은 고향에서 은거하다 광복이 되자 초대 공주유도회장(公州儒道會長)과 공주군민족정기단장(公州郡民族正氣團長)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20여 년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50년 작고하신 선생에게 대통령표창(1968), 건국훈장 독립장(1977)을 추서하였습니다.
공주시는 일제 강점기 의병장으로서 조국에 헌신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 출신인 노원섭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3년 3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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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 의병장 노원섭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항일의병장으로 본관은 만경, 자는 대제, 호는 송암이며, 공주 우성면 동곡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고, 1906년에는 공주의 용당에서 30여면의 의병을 구성하고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07년 금산에서 5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60여 차례에 걸쳐 교전하다 붙잡혀 제주도 추자로 유배되었다가 1910년 한일합병때 특사로 풀려났다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찰원으로 활동하였고, 국내외에서 임시정부 관련 문서 배포 및 독립군 군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초대 공주유도회장과 공주군민족정기단장으로 활동하다 1950년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현재 공주 우성면 동곡리에는 의병장 노원섭의 생가터와 묘소가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