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백제 제25대왕인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8일, 6호분 내부에 스며드는 빗물을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소재하고 있는 백제의 고분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었는데 송산리 고분군을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무령왕릉을 그 근처에 있던 6호분을 주위에서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하여 더 이상의 도굴을 진행하지 않았고 이 덕분에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굴을 피해 온전히 보전된 무령왕릉의 발굴은 다양한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에 대한 내용이 담긴 지석이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대 왕릉이라는 점입니다. 무령왕릉의 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정보 외에도 왕비의 장례와 합장한 연도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사, 특히 백제사 연구의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둘째,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점입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08종 4,600여점으로 이중에서 12점은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출토유물을 통해 단순한 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 및 정신문화를 살펴 볼 수 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석의 내용과 고분의 형식, 출토유물들을 통해 6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관계에 대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점입니다. 벽돌무덤이라는 형식을 통해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무령왕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통해 왜와 교류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매장풍습, 도교사상에 입각한 매지권에 대한 내용 등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1945년 광복 이후 최고의 발굴인 무령왕릉의 주인은 무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제25대 왕 무령왕입니다.
무령왕(武寧王)은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년~523년)으로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입니다. 501년 선왕인 동성왕이 시해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왕위에 즉위한 무령왕은 귀족세력을 통제하고 담로제(擔魯制)를 통해 지방통치를 강화하여 내정을 안정시켰으며 백성에게 귀농과 정착을 장려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령왕 재위 기간 중의 가장 큰 특징은 대외관계입니다. 475년 한성 함락 이후 수세적이었던 고구려에 대한 입장을 공세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즉위 후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직접 출정하여 한강 유역의 성을 장악하는 등 어느 정도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가야 지역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을 추진하여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521년 무령왕은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麗 更爲强國)” 즉, 백제가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나라는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무령왕과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공인해주었습니다. 이로써 무령왕은 475년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을 되찾았으며, 올해는 무령왕이 갱위강국을 선포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
세계유산축전
-
무령왕 동상 건립
-
2021 대백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