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역사인물 성제원(成悌元, 1506~1559) 선생은 공주 달전리 출신의 인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서봉 유우에게서 수학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조선 중기 성리학자입니다.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4세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던 선생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현인이 화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은둔의 뜻을 가졌습니다.
1549년(명종 4)에는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몇 개월 동안이나 곁을 지키며 간호하였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예에 따라 모친상을 치러 효성으로 고을에 칭찬이 높았습니다. 1551년 장례가 끝난 후에는 전답과 집을 과부가 된 누이에게 주고 공주의 선영 아래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며, 달전 언덕 뒤의 옥정봉 위에 축대를 쌓고 항상 모친의 묘를 바라보면서 울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축대를 망묘대(望墓臺)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본래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높은 체하여 나오지 않는다고 여길까 염려하여 1553년(명종 8) 청홍도(淸洪道)에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습니다. 보은 고을에서 세속의 형편에 따라 다스리면서도 정사를 펼침에 엄격하였고, 자기 자신에게는 박하였으나 백성을 어루만짐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을에는 유랑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울며 길을 막아 다시 고을로 돌아온 일도 있다고 합니다.
1555년(명종 10)에 호남 왜변이 일어났을 때, 선생이 막 공주(公州)에 왔다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곧 쪽지를 써서 향소(鄕所)로 보내니, 군병과 군용품·군량이 즉시 장만되지 않음이 없었는데 모두 지극히 정하고 치밀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