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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GONGJU CITY

2022.09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

  • 9월의 역사인물 문주왕(文洲王 혹은 文州王, ? ~ 477, 재위 : 475 ~ 477)은 백제 제22대 왕으로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웅진 천도를 단행하여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은 인물입니다.
  • 문주왕의 이름은 모도(牟都) 혹은 여도(餘都)라고 하며, 백제 제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이자 곤지(昆支)의 형이며, 제23대 왕인 삼근왕(三斤王)의 아버지입니다.
  • 문주왕은 개로왕 재위 시 보국장군(輔國將軍)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의 위치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 475년(개로왕 21) 9월, 문주왕은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성(漢城)을 포위하자 신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라는 개로왕의 명령에 따라 신라로 향했지만, 문주왕이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돌아왔을 때 한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개로왕도 전사한 후였습니다.
  •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개로왕에 이어 백제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습니다.
  •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또한 웅진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 남쪽에는 곡창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방어뿐만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475년(문주왕 원년)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은 우선 옛 왕도인 한성에서 옮겨온 백성들을 일정 지역에 분산시켜 수용·정착하게 하는 일부터 착수하였습니다. 이것은 한성 백성들을 새 왕도와 그 부근에 안치시킴으로써 뜻밖의 천도로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 또한 477년(문주왕 3) 봄에는 웅진성 안의 궁궐 및 여러 시설물을 갖추어 나가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더불어 개로왕 직계 왕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왕위계승 상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생인 곤지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하고 맏아들인 삼근을 태자로 삼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 노력하였습니다.
  • 대외적으로는 비록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유송(劉宋)에 사신 파견을 시도하였으며, 탐라국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 하지만 한강 유역의 상실과 귀족들의 내분으로 인해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의 문주왕의 대내외적 정책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천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틈타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해구(解仇)는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되었습니다.
  • 결국 취약한 왕권을 보좌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문주왕의 아우이자 내신좌평 곤지를 살해한 해구는 마침내 477년 문주왕까지 시해한 후 13세에 불과한 삼근왕을 옹립하였습니다.
  • 비록 즉위 3년 만에 해구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국난 극복을 위해 대내외적으로 추진한 문주왕의 정책, 특히 웅진 천도를 통해 백제는 국력 회복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는 521년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언으로 대표되는 백제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 공주시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웅진 천도를 단행하여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은 인물인 문주왕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2022년 9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1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2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3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4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5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백제 제22대 왕 문주왕6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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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2022 9월의 공주 역사인물 포스터 이미지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2022년 9월의 공주 역사인물 공주시 로고 웅진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다 문주왕
  • 웅진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다
  • 문주왕 미상 ~ 477 문주왕은 백제 제 22대 왕으로 이름은 모도 혹은 여도라고 하며, 개로왕 재위 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의 위치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 475년(개로왕21)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성(백제의 초기 도읍지)을 포위하자 만주왕은 신라의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돌아왔을 때 한성은 이미 함락되었으며, 개로왕도 전사한 후 였다.
  •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개로왕에 이어 백제 제 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있어 침략을 방어해주는 천혜의 요새이며, 동시에 교통의 요충지이자 넓은 호남평야가 가까이 있어 새로운 수도가 자리잡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 백제는 국난 국복을 위해 추진한 문주와으이 웅진천도를 통해 국력 회복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는 521년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로 대표되는 백제 중흥의 기반이 되었다